멋진 글씨입니다. 완전 힘이 넘치고 생동감이 넘치는 선조임금이 하사한 한석봉의 친필입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이 현판은 2016년 5월 19일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진본은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있다고 합니다.
얼마전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을 찾아본 후에
인근의 서원을 다시 한번 찾아보기로 하고는 보호자와 같이 나섰습니다.
제가 다니는 곳엔 항상 보호자가 동행합니다. ㅋㅋ
2016/10/30 - 경북 영주 가볼만한 곳-영주 소수서원(최초의 사액서원)
퇴계 이황선생은 연산군 7년(1501년)에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하여
선조3년(1570)에 돌아가셨습니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신 분입니다.
70여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연구, 후진양성에 힘써 명종 16년(1561)에 도산서당을 세웠고
사후 4년만인 선조 7년(1574)에 문인과 유림이 서원을 세웠으며 이때 선조임금이 제일 위에 보셨던
도산서원이 사액서원이 되면서 현판을 한석봉의 친필로 하사하셨다고 합니다.
이후 1970년도에 서원을 보수 정화하여 성역화했다고 합니다.
도산서원은 크게 구성면으로 살펴보면 파란색선(제가 그림판에서 그었어요..ㅋㅋ)을 중심으로 아랫부분인
14번 농운정사와 15번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시 지어졌으며,
그외 파란선의 윗쪽 부분은 퇴계사후에 문인과 유림들이 제향공간과 유물전시관 등을 지은것입니다.
경북 안동에서 봉화로 가는길에 도산삼거리에서 도산서원까지의 길은
지금쯤이면 단풍이 아주 멋드러지게 들었을 겁니다.
특히나 안동에서 봉화까지의 35번국도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미슐랭그린가이드에도 소개되었을 정도로 경치가 멋진 곳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에 단풍사진을 촬영할려다가 나올때 찍어야겠다...라고 생각했었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올시간은 벌써 어둠이 내려 단풍의 색을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답니다.
도산서원 주차장에 주차요금을 2,000원을 지불하고
매표소에서 다시 입장권을 구입합니다. 입장권은 1,500원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들어가게 되면 안동호가 유유히 흐르는 건너편으로 시사단이 보입니다.
지방유형문화제 제33호.
조선 정조 16년(1792)에 정조임금이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려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고자
어명으로 특별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라고 합니다.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고, 임금이 직접 11명을 선발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도산서원은 영남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존속했던
47개 서원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가을이 가득 들어차있는 도산서원의 전경입니다.
주말이고 해서 관광객들이 은근히 많이 있더군요.
오른쪽에 보이는 조그마한 계단이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어느 초등학교 야구부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더군요..
입구를 들어서게 되면 제일 먼저 '열정'이라고 쓰여진 우물을 만나게 됩니다.
도산서당의 식수로 사용되었다고 안내되어있습니만..
지금은 거의 사용을 안할 듯 싶습니다. 들여다 보시면 낙엽만이 세월을 안고 물위에 떠있을 뿐입니다.
퇴계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었다고 하는 도산서당의 현판이라고 하기엔 좀 작지만 현판 맞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정감이 어린 조그마한 현판입니다.
이곳이 도산서당입니다.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선생께서 거처하시던 방은 '완락재', 그리고 저 마루는 '암서헌'이라 칭하셨다고 합니다.
너무나 소박하고 작은 규모였습니다.
퇴계선생이 거처하던 도산서당의 바로 앞에 위치한 '정우당'이라는 작은 연못입니다.
원래 예전에는 이곳에 선생께서 꽃중의 군자라고 하는 연꽃을 심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계절이 계절인지라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도산서당을 나와서 바로본 위쪽의 모습입니다.
지금 보시는 모든 부분은 후학들이 선생의 덕을 기려서 사후에 세운 건물들입니다.
매화나무가 많이 보입니다.
선생께서 단양군수로 재직시 두향이라는 기생이 준 매화나무 화분하나만을 들고 돌아왔다고 할 정도로
선생께서는 매화나무를 사랑하셨나 봅니다.
퇴계선생의 매화음 '도산 달밤에 매화를 읊다'라는 싯구절을 옮겨봅니다.
'밤기운 차가워라 창을 기대 앉았자니
두둥실 밝은 달이 매화가지에 오르누나
수다스레 가는 바람 불러오지 않더라도
맑은 향기 저절로 동산에 가득한걸"
먼저 제일 앞쪽에 보이는 진도문입니다.
이 진도문의 좌우 양쪽에는 서재로 쓰였던 광명실이 위치합니다.
진도문의 좌측에 있는 광명실입니다.
유홍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편에서 보면 이 양쪽의 광명실로 인해서
도산서원의 건축적으로 가장 문제가 생겼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같은 구조로 진도문의 우측에 지어진 광명실입니다.
하지만 유홍준교수 역시 이 광명실이 집을 버려놓았다고 주장하지만
도산서원 건축의 참맛을 오히려 광명실의 쪽마루에서 찾고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저 좁은 쪽마루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멋지답니다.
마치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이라는 철근구조물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모파상은 이렇게 말했었다고 합니다.
"저 파리의 추악한 건물을 보지 않으려면 우리가 에펠탑에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라고...
도산서원의 전교당 입니다.
선조 7년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형식입니다.
강당인 대청과 거실로 쓰인 온돌방 한존재 로 구성되었습니다.
병산서원의 입교당에서 앞면을 바라보면 만대루를 통해서 보이는 풍경이 완전 멋지지만
이곳 전교당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분명히 앞쪽에 위치한 광명실로 인해서
시선을 막는 것만은 분명합니다...ㅠ.ㅠ
그리고 전교당의 앞에 양쪽에 동쪽으로는 박약재
서쪽으로는 홍의재가 있습니다.
박약재와 홍의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공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박약재의 뒷편으로 난 쪽문을 통과하면 이렇게 장판각 이 나옵니다.
세월을 고스란히 안고있는 오래된 나무결들...서원에서 발행한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입니다.
퇴계선생문집, 유묵, 언행록, 병서, 도산십이곡 등 목판 2,790여장을 보관해 오다가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서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상덕사입니다. 보물 제211호
퇴계선생의 위패와 제자인 월천 조목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으며
매년 춘.추(음력2월, 8월)에 향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상덕사 옆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렇게 전사청이 양쪽으로 있습니다.
하나는 제수청이라하고 또 하나는 술창고라고 할 수 있는 주고(酒庫)가 있습니다.
아마도 위의 사진이 제수청이고...
이곳이 주고 인듯 합니다.
저 넓은 공간에 술이 가득했을 것을 생각하면 흐믓해 지는 분들도 있을듯...
전사청을 나와서 고직사로 가는 길 위에서 아랫쪽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좌측이 도산서원의 농운정사... 일명 기숙사입니다. 우측은 유물전시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고직사 입니다.
서원을 관리하는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 고직사 가 있습니다.
역락서재.. 퇴계선생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매표소에서 서원으로 오가는 길입니다.
한쪽에는 가지런히 정돈된 향나무와 한쪽으로는 불타는 듯한 단풍길..
사실 어두컴컴한 시간이었지만 카메라의 감도를 엄청 올려서 촬영하니 이정도로 나오더군요..
하지만 서원에서 매표소까지의 단풍보다가는 도산삼거리에서 매표소까지의 단풍이 훨씬 멋지답니다.
옥진각 이라고 하는 도산서원의 유물전시관에서 다른 전문적인 서적이나 혼천의 등등 많이 있었지만
제일 마지막 구절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촬영했습니다.
"빼앗을 수 없는 뜻과, 꺾이지 않는 기상과 흐르지 않을 앎을 늘 지니도록 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퇴계선생은 1570년 12월 8일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마지막 말씀이 "저 매화나무에 물줘라~~"였다고 합니다.
조촐한 비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 써놓고
그옆에 스스로 찬한 명문이 이렇게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정말로 명문이라서 소개합니다.
"나면서 어리석고,
자라서는 병도많아
중간에 어찌하다 학문을 즐겼는데
만년에는 어찌하여 벼슬을 받았던고!
학문은 구할수록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더 주어졌네
나가서는 넘어지고
물러서서는 곧게 감추니
나라은혜 부끄럽고
성현말씀 두렵구나
산은 높고 또 높으며
물은 깊고 또 깊어라
(중략)
조화타고 돌아가니
무얼다시 구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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